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쿠라다몬 의거 (문단 편집) === 배경 ===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감시와 탄압, 자금과 인력의 부족, 내부 분열 등으로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비단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만주의 한국 무장 [[독립운동]] 세력 전반이 서서히 일본에 진압당하고 있었고 러시아 지역에서의 독립운동도 [[러시아 내전]]이 종식되면서 끝났다. 그리고 식민지가 된 조선 본토에서는 조선 총독부의 문화 통치로 인해 지식인들이 변절하고 있었다. 이에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요인 암살, 주요 시설 파괴와 같은 비밀공작([[사보타주]])을 수행할 단체를 만들 필요성을 느끼고 [[한인애국단]]을 창설했다. 그러던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했다. 당시 일본 제국은 중국의 상황을 불안한 눈으로 매우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장제스]]의 [[중국국민당]]과 [[국민혁명군]]은 1928년부터 북벌을 단행하여 이념적, 군사적, 정치적으로 중국 전역을 통일하고 있었고 일본 제국은 중국에서의 자신들의 이권을 침해당할 위기라고 판단했다. 결국 일본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던 [[장쉐량]]의 만주 [[봉천군벌]]마저 [[동북역치]]를 통해 국민당에 가담하며 중국의 통일이 완수되자, 일본 [[관동군]]의 모험주의적 장교들은 독단적으로 불법 침공을 감행해 만주를 식민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은 전 중국인들의 대대적인 분노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국제 사회를 경악시켰으며 전 세계적으로 규탄 성명이 쏟아졌다. 때문에 이 사건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있어서는 중국과 단단한 항일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기회로 보였다. 중국의 여론은 당장 중일전쟁을 일으켜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할 기세였기 때문. 그러자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과 막후에서 접촉하던 중국 국민혁명군 상하이 군수공장 주임 [[김홍일(군인)|김홍일]][* 독립운동가. 20년대에는 무장독립운동, 30년대에는 국민혁명, 40년대에는 대일 항전과 한국군 건군에 참여했다. [[6.25 전쟁]] 당시에는 [[대한민국 국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1군단]]을 이끌고 북한군의 침략을 지연시켰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집권기에 [[외교부장관|외무부장관]]으로 영전했다.] [[대령|상교]]는 무기 생산 현황을 보고할 겸 난징으로 올라가 국민혁명군 최고사령부의 분위기를 알아보고자 했다. 만일 전쟁이 결의되고 있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혁명군의 공동 전선도 구성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중국의 여론과는 달리 장제스와 국부군 사령부는 일본과의 현대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다고 냉정하게 판단했으며 대신 일본을 [[국제연맹]]에 제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국부군 군사회의 내의 동료 장교들에게 위와 같은 내용을 전달받은 김홍일과 김구는 매우 실망했다. 그런데 이때 홀연히 김구와 임시정부를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봉창]]이었다. 이봉창은 처음에는 매우 일본인스러운 인상을 풍겨서 김구 외에는 모두가 그를 밀정으로 의심했으나 김구는 그를 계속해서 믿어 주었다.[* 다만 김구조차도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해서, 이봉창에게 자신의 이름을 '백정선'이라는 가명으로 알려주었고 이봉창은 죽을 때까지 김구를 백정선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봉창은 놀랍게도 일본 제국의 [[천황]]을 암살할 것을 주장했다. 이 이야기가 처음으로 나온 것은 술자리였고 반대도 많았지만 이봉창은 매우 진지했고 김구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한인애국단에 가입시킨 후 거사를 진행시켰다. 일견 무모해 보이는 이 계획이 실행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천황을 암살함으로써 만세일계의 천황 신앙을 바탕으로 돌아가는 일본 제국에 대대적인 타격을 입히고 세계와 조선에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를 통해 침체되던 한국 독립운동에 새 활력을 강하게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었다. 부가적으로는 [[만보산 사건]] 등으로 악화되던 중국의 대 한국 인식을 쇄신하여 동맹으로 전환시키는 효과를 노릴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잘만 하면 천황의 복수를 부르짖을 일본 제국과 영토 수복을 원하는 중국의 전면 전쟁을 유도함으로써 항일 연합전선을 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 핵심 인물 || || [[파일:김구.jpg|width=200]] || [[파일:이봉창.jpg|width=200]] || [[파일:khidiploma.jpg|width=200]] || || [[대한민국 임시정부]][br]'''[[김구]]''' || [[한인애국단]][br]'''[[이봉창]]''' || [[국민혁명군]][* [[중국 국민당]]의 당군][br]'''[[김홍일(군인)|김홍일]]''' || 주요 인사들의 역할은 다음과 같았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작전과 동선 전반을 직접 설계했으며 국민혁명군 [[김홍일(군인)|김홍일]] 상교는 김구 주석이 짠 작전의 세부 사항을 조정하고 폭탄을 조달했다. 그는 상하이 군수공장 주임이었기 때문에 폭탄 한두 개쯤 빼돌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폭탄 투척 거리가 생각보다 매우 길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홍일은 폭발력이 좀 작으나 신뢰성이 높고 가벼운 마미 수류탄을 준비했다. 그리고 행동을 맡은 [[이봉창]]은 자신의 넓은 일본인 인맥을 바탕으로 안전을 보장받은 뒤 일본 도쿄에 직접 잠입해 암살을 실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그는 상하이 일본 조계의 경찰서장과 친분이 깊었기에 서장이 써 준 추천서를 바탕으로 별 탈 없이 일본에 잠입할 수 있었다. 물론 해당 서장은 사건의 여파로 인해 파면되어 본토 송환되었다가 [[자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